본문바로가기

나눔마당

Junggye Yangeop Catholic Church

현재 위치

Home > 나눔마당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천국 팔언

다시 한 번 얘기해 볼까요?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훌륭하십니다.

괜찮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행복합니다.

사랑합니다.

바로 이 천국 팔언이 주님께서 불러주신 자의 입에서 나와야 될 말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천국 팔언을 하는 사람이 앞에 있을 때 우리는 그 사람을 보고 뭐라 그러느냐?

‘당신 멋져. 당신 멋져’ 그래요.

근데 이 당신 멋져는 뜻이 있어요.

자~ 여러분들이 ‘당’ 해보세요. 제가 풀이할께요.

‘당’ - 당당하게

‘신’ - 신나게

‘멋’ - 멋들어지게

‘져’ - 져주면서 살자.

이게 바로 ‘당 신 멋 져’

신나고 당당하고 멋지게 져주면서 사는 것이 뭐냐!

한마디로 부활신앙입니다.

 

부활하기까지도 힘들지만 부활을 지켜나간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부활에 이르기까지 수난과 고통을 참는 것, 참아서 부활하기까지도 힘이 들지만

부활한 후에 부활신앙을 유지해나간다고 하는 것도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어렵죠? 안 쳐다볼 줄 알고....졸면 안 됩니다.

가끔 쳐다볼 겁니다. 여기 옆쪽도....저쪽도 마찬가집니다.

옆에 있다고 해서 실컷 졸면 안 됩니다.

 

부활한 후에 복음서는 두 가지의 사건을 전합니다.

빈무덤 앞에서 울고 서있던 막달라 마리아 이야기가 나오고,

엠마오로 가는 제자 이야기, 이 두 사건이 아주 큰 사건이었습니다.

 

첫 번째가 어떤 사건이였다구요?

빈 무덤 앞에서 울고 서있던 막달라 마리아

‘누가 우리 주님을 가져갔어요.’ 엉엉 울고 있었어요.

주님 어디 계신지 안다면 제가 모셔가겠습니다.

예수님을 누구로 알았다고 나옵니까?

요한복음 20장 11절 이하에 동산지기로 알았다 그랬어요.

그러다가 무슨 소리를 들었을 때 예수님을 알아봤습니까?

이름을 불렀을 때~~

‘마리아야!’ 하고 예수님이 이름을 불러줬을 때

눈이 딱 열려서 예수님인 걸 안 거예요.


우리 인생살이에서 우리 눈을 가리는 게 무엇입니까?

첫 번째 두려움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예수의 제자라는 것이 탄로가 날까봐...

예수의 제자라고 하면 잡혀 들어 갈까봐....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앞날에 대한 두려움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이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대도 주님께 매달리기 보다는 세상 것에 매달려 사는....

세례 받고 난 후에도 점집, 철학관, 무당한테 들락거리는 신자가 30%가 넘어간대다는 통계예요.

이게 천주교신자들의 현주소예요.

우리 믿는 이들에게 두려움이 어디 있어요?



두 번째로 무엇이 우리 눈을 가리고 있을까요?

앞날에 대한 불안이었습니다.



예수 따라 다니다 쫄딱 망했다!

예수가 왕이 되면 논공행상에 의해서 뭔가 한 자리 얻을 줄 알았는데...이게 뭐야 인생 망첬다...

앞날에 대한 불안  ‘뭘 먹고 살아갈까!’



세 번째 우리 눈을 가리는 게 상실감



네 번째 우리 눈을 가리는 것 분노예요.

분노에 가득 차 살 때에는 예수님을 못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너무 믿었어요.

그러나 그 믿음은 세속적인 믿음이었지요?

그 믿음이 깨지니까 보복으로 바뀝니다.

이게 바로 약한 인간의 모습이지요.

빨마가지를 흔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요!' 하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모셨던 그 분이 비참하게 죽고 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가  바로 보복으로 이어져요.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십자가에 못 박으시요!



두려움, 분노, 앞날에 대한 상실감....

이런 것이 우리의 눈을 가리고 예수님을 못 보게 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늘 투정을 합니다.

주님, 내가 힘들 때 도대체 어디 계셨어요?

나는 왜 늘 혼자 살아야 합니까?

내가 힘들 때 손 한 번 잡아주셨으면...그렇게 힘들게 살지 않았을텐데....

주님은 항상 우리 곁에 계셨는데도 항상 눈이 가리워져 있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볼 수 없었던 겁니다.

어떤 이가 살아왔던 길을 뒤돌아보니까 평지에는 자기 발자욱과 또 한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대요.

그게 누구 발자국?

예수님 발자국

가파른 산비탈 올라갈 때는 자기 발자국밖에 없었대요.

‘아, 이때는 주님이 나를 떠났구나! 나 혼자 이 높은 산을 고생을 하면서 넘어왔구나!’

불평을 했습니다.

주님. 내가 뒤돌아보니까 힘들 때 내 발자국밖에 없었어요.

그때 주님, 어디 가시고 나 혼자 높은 산을 넘게 하셨습니까?

예수님 하시는 얘기가

“이놈아, 그 발자국은 니 발자국이 아니고 내 발자국이야...

내가 너를 업어서 날랐기 때문에 니 발자국은 없고 내 발자국만 남은 거야...

내가 너를 업어 나르느라고 등골이 다 빠진 것 너는 모르냐! "

30리 길을.... 3시간을.. 예수님과 가면서도 눈이 가리워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단 한 번도 떠나신 적이 없어요.

엄마가 걸음마 가르칠 때 어떻게 해요?

뒤에서 아이 옷자락 잡고 ‘아이고 내 새끼, 잡고 걸어 봐!’

엄마는 손 슬그머니 놓고 문지방 뒤에서 어떻게 하나...봅니다..

애가 걷다가 엄마가 없는 것 같으면...뒤 돌아보다가 넘어지지요?

엄마는 언제든지 슬라이딩 을 해 가지고 애를 잡을 준비하고 있어요.

애 눈에만 엄마가 안 보이는 것이지...엄마의 시선은 단 1초도 그 아이에게서 멀어진 적이 없었어요.



언제까지 예수님, 우리 뒤만 잡고 있어야 됩니까?

우리 발로 걸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를 놓을 때가 있어요.

그러나 놓더라도 그 분의 시선마저 우리에게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같이 가도.... 이 등신들이 당신을 못 알아보아도....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에 관한 기사는 다 찾아서 설명을 해 주셔요.

이럴 때는 이런이런 얘기가 있었잖아~

그래도 두 제자는 완전히 못 알아보았지요.



성서 설명하면서 하두 속이 상하니까

‘너희들, 참 어리석기도 하다!’



성서에서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의 뜻이 있지요

첫번째, 지혜가 없다는 뜻입니다.

두 번째, 분별이 없다는 뜻입니다.

세 번째, 순명치 않는다는 뜻입니다.



성서에 ‘너 어리석다!’는 말뜻은

지혜가 없고, 분별력이 없고 ,순명하지 않는구나!



성서에 어리석은 짐승, 뭐가 대표적으로 나옵니까?

<당나귀>

그  어리석고 고집 세고 뒷발질하고....

한 번 화나면 주인이 아무리 잡아끌어도 버티고.... 교만의 상징이요,

고집덩어리의 상징인 당나귀를 성지주일 날,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가서

“주님께서 쓰시겠답니다.”

 

다시 말하면 어리석고 고집 센 나를 주님이 쓰시고자 합니다.

주님은 그 고집덩어리 당나귀를 타고 이스라엘에 입성하십니다.

여러분이 이태까지 살면서 주님이 여러분 쓰시겠다고 한 적 여러 번 있었을 거예요.

신부님의 입을 통해서, 수녀님의 입을 통해서... 그러나 우리 그럴 때마다

‘저 불러주시고 쓰십시오...능력이 미약하지만  죽을힘을 다해서 애써 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부활신앙을 사는 사람인데... 과연 얼마나 우리는 순명했고

분별력을 가지고 ‘네’ 했고 지혜롭게 대답했던가요.



성서는 머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령으로, 마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두 제자는 예수님이 그토록 성서말씀을 통해 설명을 했건만 못 알아들었습니다.

성서학 박사학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학문적으로만 연구하면

성서 안에 계신 예수님을 못 만납니다.

예수님은 단순한 영혼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 보이시죠.



우리가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눈을 뜨게 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첫째, 고통, 십자가입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악이지만...고통을 당하는 인간은 외로워지고 고독해집니다.

고독의 수치가 올라갈수록 우리 영의 눈이 열리고 하느님을 보게 됩니다.

내 안에 있던 인간이 밀려나가면서 그 안에 하느님이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고통 그 자체는 악입니다.

선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어느 누구나 고통을 당하면 외롭고 분명히 인간을 괴롭히는 것인데

남편은 죽고 싶은데....마누라는 옆에서 코를 드르렁~~ 골면

‘아, 나 혼자구나!’

외롭습니다.

고통가운데 혼자가 될 때 하느님을 다른 때보다 쉽게 만나기 때문에

신비스럽고....예수님 볼 수 있다는 걸 겁니다.



두 번째, 우리 눈의 영을 열리게 하는 것은 영적 포기입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쁨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기적이 옵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행복해 질 겁니다.

포기하는 것만큼 영의 눈이 열립니다.



세 번째로 우리의 눈을 열게 하는 것은 성체성사입니다.

빵을 떼어 주실 때 그 때 눈이 열렸다.

천국 팔언을 기억합시다...

당신 멋져~~도 기억합시다.

‘당’ - 당당하게

‘신’ - 신나게

‘멋’ - 멋들어지게

‘져’ - 져주면서 살자.

그 다음에 건배



오늘 주신 은혜...치유의 성지, 구마의 성지, 믿음의 성지에 불러주신

성모님의 사랑에 감사드리면서...

오늘 비록 이 자리에 참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냉담중인 가족 기억하시고.....

앓고 있는 가족 기억하시고....

내 가족만 아니라 내 집 울타리를 뛰어넘어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기억합시다. 아멘

 

 

- 김웅열 토마스아퀴나스 신부님